1949-1953

창립기- (4) 1949-1953년

주지하듯이 이 시기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분단 상황이나마 어느 정도 정치.경제.사회적 질서가 자리잡혀 가는 듯하다가 한국전쟁으로 상황이 급변하는, 해방 50년 역사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시련이 점철되던 때였다. 생리학회와 의학협회의 운명 역시 국가와 마찬가지였다. 1948년 8월 15일의 정부 수립 뒤 국호(國號) 대한민국에 따라 각각 대한생리학회와 대한의학협회로 개칭을 하고, 제3회 학술대회를 준비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49년 10월 22일, 23일의 제3회 대한의학협회 학술대회에서는 모두 10편의 생리학 논문이 발표되었다. 지난 해에 비해 편수로는 비록 1편이 늘어났을 뿐이지만, 세브란스의대와 서울의대의 합동 세미나와 같던 모습에서 새로 이화의대(김철), 대구의대(이종만, 김대수), 서울여의대(정성장)가 논문 발표를 시작함으로써 명실 공히 전국적인 학술대회의 성격을 띠어 가게 된 것이다. 또한 특기할 것은 이후 수십년에 걸친 연세의대의 '해녀 연구'가 이병희 교수의 '해녀에 관한 생리학적 고찰'로 첫번째 모습을 드러내었으며, 정년 때까지 이어진 김철 교수의 뇌생리에 대한 연구가 '정상 동물 뇌파 관찰을 위한 고정전극'의 제목으로 선을 보인 사실이다.

제3회 대한의학협회 학술대회
1949년 10월 23일(일), 국립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제1강의실
1. 海女에 關한 生理學的 考察 世醫大 生理 / 李炳熙
2. 血小板 數의 一新算定法 世醫大 生理 / 林宜善
3. 蕃椒(고초) 投與로 因한 實驗的 Eosinophilie 世醫大 生理 / 林平基
4. 正常 動物 腦波 觀察을 爲한 固定電極 梨大 生理 / 金喆
5. Anaphylaxy가 血液凝固에 밑이는 影響 大邱醫大 生理 / 李鍾晩
6. 描記式 血液凝固時間 測定 裝置의 考案 大邱醫大 生理 / 金大洙
7. 토끼 심장의 Dextrogram과 Levogram의 비교 女醫大 生理 / 鄭聖璋
8. 한인의 정상 E.C.G.의 통계적 고찰 國大 生理 / 南基鏞·o申東薰
9. 근육이 흥분할 때의 전기저항의 변화 國大 生理 / 申東薰
10. 사람의 E.C.G.에서 빛자극으로 일어나는 변화 國大 生理 / 南基鏞·o李鍾晥

38선에서의 국지적 교전과 분쟁은 여전하였다. 더욱 알찬 1950년도 가을의 학술대회를 준비하며 교육과 연구에 매진하던 각 대학 생리학교실과 대한생리학회는 6월 25일의 전면전 발발로 말 그대로 개인과 교실과 학회의 생존과 명맥 유지에 급급하는 처지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학회는 회장이자 가장 '어른'인 이갑수 교수(당시 서울의대 학장)마저 '납북'으로 잃게 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회장 개인의 학회도 아니고 회장 한 사람이 영도하는 학회도 아니었지만, 학회 창립 이전부터 그리고 창립과 그 이후의 학회 활동 과정을 통해 보여 준 지도 역량에 비추어 볼 때 학회가 감내할 수밖에 없었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학회는 이종륜 부회장이 임시로 회무를 총괄하는 체제로 유지되다가 1952년 6월, 3년만에 부활된 제4회 대한의학협회 학술대회 시에 소집된 대한생리학회 정기 총회에서 이종륜 교수를 제7대 회장으로 선임하여 새로운 건설에 몰두하게 되었다. 1950년과 51년 이태 동안은 아예 의학협회 학술대회가 열리지 못했으며, 1952년과 53년의 제4회 및 제5회 의학협회 학술대회에서는 5회 때(1953년 5월 30일 토요일, 부산 동대신동 서울의대 임시교사 대강당) 곽재희 선생(부산 濟生外科)이 '神經元의 機能硏究와 神經性 諸現狀 再檢討 - Neuron의 activity와 物理的 Energy 集中狀態의 相對性'이라는 연제로 특별강연을 하였을 뿐 그밖에 다른 생리학 논문 발표는 없었을 정도로 회원들의 학술 활동은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다.